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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의 정자

제천정

제천정(濟川亭)은 조선시대 한강변에 위치했던 왕실(王室) 소유의 정자로, 주변의 아름다운 경치와 함께 사랑을 받았던 대표적인 정자이다. 제천정은 보광동 강가 언덕 즉 한남대교 북쪽 어귀에서 서쪽으로 바라보이는 용산구 한남동 537번지 일대에 있었다. 세조 2년(1456)에 세웠으며, 세조로부터 명종 18년(1563)에 이르기까지 한강변 정자 가운데서 왕이 가장 자주 찾은 곳이었다.

이 곳은 경도십영(京都十詠)에도 있듯이 '제천완월(濟川翫月)'이라 하여 달 구경의 경치가 좋은 곳으로 꼽혔던 곳으로 광희문(光熙門)을 나와 남도지방으로 내려가는 길목 나루터 옆에 있었기 때문에 왕이 선릉(宣陵)이나 정릉(靖陵)에 친히 제사하고 돌아오는 길에 잠시 들러 쉬기도 하였으며, 또 한 중국사신이 오면 으례 이 정자에 초청하여 풍류를 즐기게 하였다.

성종은 월산대군(月山大君)이 세상을 떠난 뒤 이 제천정에 자주 나와 정자의 규모가 작고 좁다 하여 이를 크게 고쳐 짓기도 하였다. 또한 명종 13년(1558)에는 임금이 이 정자에 올라 수전(水戰)을 관람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인조 2년(1624) 이괄(李适)의 난으로 왕이 왕대비와 함께 종묘와 사직단의 신주(神主)를 받들고 공주(公州) 로 피난갈 때, 밤에 한강을 건너면서 이 제천정에 불을 질러 그 불빛에 의지하여 강을 건넜다는 것으로 미루어 이 때 불타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1958년에 발행된 《서울명소고적》에 의하면 이 정자 건물은 청일전쟁 때까지도 남아 있었으며, 그후 왕실로부터 미국인 언더우드(H. G. Underwood)에게 불하하였는데, 뒤에 어느 틈에 없어졌는지 그 자리마저 황량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망원정

망원정(望遠亭)은 양화나루(楊花津) 서쪽 언덕인 마포구 망원동 137, 207-1번지 일대에 있었다. 태종의 아들이자 세종의 형인 효령대군(孝寧大君, 1396∼1486)의 별장으로 세종 6년(1424)에 건립되었다. 이 정자는 처음에는 희우정(喜雨亭)이라 하였는데, 세종 7년(1425) 왕이 농사 형편을 살피러 이 곳에 거둥하였다가 새 정자에 올랐을 때 때마침 기다리던 비가 내려 온 들판을 흡족하게 적시므로 왕이 매우 기뻐하여 정자의 이름을 희우정이라 붙인 것이라 한다. 효령대군은 이러한 왕의 행차와 명명(命名)에 깊이 감사하여 부제학(副提學) 신장(申檣)으로 하여금 현판을 쓰게 하고, 변계량(卞季良)에게 기문(記文)을 짓게 하였다.

변계량의 기문과 망원정의 주변 풍광을 노래한 시들에 의하면 정자가 사치하지도 않고 누추하지도 않으며, 강변에 매우 가깝게 있고 누각 형식의 건물로 둘레에 난간이 돌려져 있었으며, 주위에는 소나무와 버드나무가 울창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작가 미상의 희우정 그림을 보면 강가 절벽 암반 위에 덤벙주초석을 놓고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건물로서, 마루 둘레에는 난간을 돌리고 팔작지붕을 한 모습이다.

세종 27년(1445) 왕이 이 곳에 거둥하여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이천(李?)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대포를 발사하며 실전을 방불케 하는 훈련을 하게 하고, 세자와 대군 등이 희우정 서쪽 봉우리에 올라 관람하였다. 따라서 이 부근은 경치 좋은 명소로서만이 아니라 수륙군(水陸軍)의 훈련장으로도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성종 15년(1484)에는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月山大君, 1454∼1488)이 정자를 고쳐 짓고 이름을 망원정이라 하였다. 이는 이 정자에 오르면 연희평(延禧坪)의 넓은 들판을 건너 도성 서북쪽의 산악지대를 바라볼 수도 있고, 또 동남쪽으로 한강을 끼고 벌려 있는 산야의 먼 경치를 잘 바라볼 수 있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성종은 세종 때의 예에 의하여 매년 봄 가을 이 곳에 나와 농사 형편을 시찰하고 또 수전 연습을 관람하였으며 문인 명사들과 시주(詩酒)를 즐기기도 하였다.

그 후 연산군 12년(1506)에는 연산군의 향락행위를 위하여 한강 명소인 망원정을 크게 확장할 것을 명하였다. 이 때 지붕은 초가로 하고 건물은 천여명이 앉을 만큼 크게 짓게 하며, 정자 위에서 바라다 보이는 건물은 모두 철거하도록 하였으며, 정자의 이름도 수려정(秀麗亭)으로 고치게 하였다. 그러나 이해 9월 중종반정으로 모든 공사는 중지되고 철거됨에 따라 망원정도 다시 옛 모습으로 명사들이 즐기는 명소가 되었다. 이 곳은 경치가 매우 좋아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던 연회장으로도 사용되었으며 잠두봉(蠶頭峰)과 가깝기 때문에 잠두봉을 찾는 길에 이 곳에 들르는 사신도 있었다.

그러나 망원정은 1925년 을축년(乙丑年) 대홍수 때에 유실되어 마포구 망원동 동명에서만 그 자취를 찾을 수 있었다. 그후 서울시에서는 1986년에 한강변 문화유적 복원계획의 일환으로 문헌 고증과 현지 발굴조사를 통해 망원정을 복원하기로 결정하였다. 망원정 복원공사는 1988년 6월 20일부터 1989년 10월 20일까지 시행되었으며, 원래 위치에서 약간 벗어나 마포구 동교로8안길 23 (합정동)에 대지 341.5평에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2층 팔작기와집 누각으로 복원되었다. 그리고 1990년에 망원정 터를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9호로 지정 보전하고 있다.

압구정

압구정(狎鷗亭)은 강남구 압구정동 산 310번지 일대인 동호대교 옆 현대아파트 11동 뒤편에 있었으며, 세조 때의 권신인 상당부원군 한명회(韓明澮, 1415∼1487)의 별장이었다. 명나라 한림학사(翰林學士) 예겸(倪謙)이 지은 '압구정'이란 정자의 이름은 한명회의 생활과는 다르게 부귀공명 다 버리고 강가에서 해오라기와 벗하여 지낸다는 뜻을 지니고 있어 이 곳을 지나가는 문인·유지들의 비웃음을 사기도 하였다 한다.

이 정자는 중국 사신을 접대하는 곳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는데, 압구정의 배 띄우기는 경도승경(京都勝景) 중의 하나였다. 그 후 한명회는 관직을 사퇴하고 이 곳에서 여생을 지내려 하니 성종 7년(1476)에는 왕이 압구정시(狎鷗亭詩)를 친제하여 하사하였고 조정 문신들도 차운(次韻)하니 그 시가 수백편이나 되었다 한다.

정자의 모습은 겸재(謙齋) 정선(鄭敾)의 〈압구정도(狎鷗亭圖)〉에 높은 언덕 위에 정자가 있는데 마루 둘레에 난간을 돌리고 팔작지붕을 한 형태로 그려져 있어, 소박한 일반적인 정자와는 달리 비교적 규모도 크고 주위 경치와 어울려 화려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19세기 말에는 박영효(朴泳孝, 1861∼1939)의 소유가 되었으나, 갑신정변으로 박영효가 국적(國賊)으로 일체의 재산이 몰수될 때 이 정자도 헐렸다. 이후 1970년대 영동개발에 따라 현대아파트가 들어서면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동네이름으로 남게 되었으며, 근래에 표석을 설치하여 압구정 터임을 밝혀 놓았다.

천일정

천일정(天一亭)은 남산 줄기가 동남쪽으로 뻗어나가 한강에 닿는 강안, 용산구 한남동 459번지에 있었다. 고려시대의 절 터였던 이곳에 조선 성종 때의 문신 김국광(金國光, 1415∼1480)이 처음으로 정자를 지었으며, 이항복(李恒福, 1556∼1618)의 소유를 거쳐, 한때 민영휘(閔泳徽, 1852∼1935)의 소유이기도 하였다. 정자의 이름은 당나라 왕발(王勃)의 〈등왕각(藤王閣)〉 서문에 있는'추수공장천일색(秋水共長天一色)'의 시구를 취하여 이름하였다 한다.

3,000㎡나 되는 넓은 터전에 동쪽으로 아늑한 안채가 있고 정남향으로 조금 높은 터에 청원당(淸遠堂)이란 현판이 걸린 중사랑이 있었으며, 그 아래 조금 낮은 터에 강을 내려다보고 바깥 사랑채 격인 천일정이 자리잡고 있었다. 한강변 높은 곳에 축대를 쌓고 _?자형 평면으로 배치하였으며, 앞쪽으로 돌출된 누의 아래로는 사각 장초석을 세웠고 팔작지붕을 하였었다. 멀리 강 건너 압구정이 바라보이던 곳으로 1950년 6·25전쟁 때 폭격 맞아 없어졌고 지금은 그 부근에 한남대교가 놓여 있다.

용왕봉저정

용양봉저정(龍?鳳?亭)은 동작구 노량진로32길 14-7 (본동)에 위치하고 있는 조선 후기의 누정(樓亭)으로,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6호로 지정되었다. 정조는 효심이 지극한 군주로 비명에 간 아버지 사도세자(思悼世子)를 추모하는 일에 정성을 다 하였다. 사도세자의 원묘(園墓)는 처음에는 영우원(永祐園)이라 하여 지금 서울시립대학교 뒷산인 배봉산(拜峰山)에 있었는데 그 규모가 작고 초라하였다. 이를 가슴 아파하던 정조가 1789년 11월에 화산(華山, 수원)으로 옮긴 후 현륭원(顯隆園)이라 하고, 해마다 친히 참배하였다.

정조가 수원 에 갈 때마다 노들강(한강)에 배다리(舟橋)를 설치하고 건넜는데, 시간이 걸렸으므로 강을 건넌 후에 잠시 어가(御駕)를 머물게 하고 쉴 자리가 필요하여 작은 언덕에 행궁(行宮)으로 이 누정을 지었던 것이다. 당시의 모습은 이신(爾信)의 그림 <노량진주교(鷺梁津舟橋)>와 <행궁도(行宮圖)>에서 짐작할 수 있다. 이 누정은 정조 13년(1789)에 건립을 시작하여 2년 후에 완공하였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원래 이 집 터는 노저(露渚) 이양원(李陽元, 1533∼1592)의 집 터였다고 한다. 용양봉저정이란 이름은 '용이 뛰놀고 봉(鳳)이 높이 나른다'는 뜻으로, 이 곳이 국왕이 잠시 머무는 행궁 구실을 하였으므로 곧 국왕 행차가 성대함을 뜻하는 것이다. 또 이 곳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점심을 들었기 때문에 일명 '주정소(晝停所)'라 부르기도 하였다.

또 이 누정은 매우 크고 화려하여 여기서 내려다보면 강 언덕의 푸른 수림(樹林) 아래로 한강의 맑은 물결이 내려다보이고, 저 멀리 눈을 돌리면 남산 북악 사이로 서울 장안의 풍경이 그림같이 펼쳐져 있으므로 전망도 매우 좋은 곳이다. 수고롭게 강을 건너 이 곳에서 간단한 연석(宴席)을 마련하고 서늘한 바람, 맑은 공기를 곁들여 술을 한잔 든다는 것 또한 흥취 있는 일이었다. 정조는 이른 아침 일찍 용양봉저정에 올라 이와 같은 정경의 일면을 읊은 시를 남기기도 하였다. 처음에는 이 행궁에 정문(正門)과 누정 등 두 세 채의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고종 때 유길준(兪吉濬)에게 하사된 후 전전하다가 1930년 일본인 이케다(池田)의 손에 들어가 건물 일부를 철거하고 부근 5,300여평에 온천·욕장·운동장·식당 등을 둔 오락장으로 삼고 이름도 '용봉정(龍鳳亭)'으로 고쳐 부르는 수난을 당했다. 광복 후 이를 국유(國有)로 환원하여, 오락시설을 철거하고 원래의 이름으로 고쳤다.

현존하는 건물은 2단의 나즈막한 기단 위에 사각기둥을 세웠으며, 건평 10평에 정면 6칸 측면 2칸 규모의 단층 팔작지붕이다. 중앙부는 온돌방으로 꾸미고 사방에는 띠살 분합(分閤)을 달았으며, 방을 가운데 두고 좌우에 퇴칸을 설치하여 마루를 꾸몄다. 정면 중앙 3칸은 개방되어 디딤돌을 통해 마루로 올라가게 되었고, 둘레에는 난간을 돌렸다. 네모 기둥머리에는 초익공(初翼工)을 결구(結構)하고, 이중량(二重樑)을 둔 5량구조(五樑構造) 겹처마집으로 간결하면서도 격식을 갖춘 특수기능의 건물이다.

낙천정

낙천정(樂天亭)은 조선 태종이 왕위를 세종에게 물려주고 머물던 정자로, 광진구 자양동 446번지 현대아파트 단지 내에 있다. 이곳은 원래 화양동에서 동남쪽으로 한강변을 끼고 거슬러 올라간 곳 언덕 위였다. 이 곳 언덕은 모양이 시루를 엎어 놓은 것 같다고 하여 시리미(甑山) 또는 대산(臺山)이라 하였으며, 후에 발산(鉢山)이라 하였다. 대산은 표고 42.8m 밖에 안되었으나 한강이 발 아래 감돌아 흐르고 강 속에 처져 섬을 이루고 있는 잠실동·신천동과 그 건너 남한산성이 병풍 같이 벌려 섰고, 남쪽에 청계산·관악산, 그리고 서쪽에는 남산이 한 눈에 들어 오는 승지(勝地)였다.

태종은 그 18년(1418) 왕위를 아들 세종에게 양위한 후 그해 9월 이 곳에 이궁(離宮)과 그에 딸린 정자를 짓기 시작하여 이듬해인 세종 1년(1419) 2월 낙성하고, 좌의정 박은(朴?)에게 명하여 정자의 이름을 짓게 하니 《주역(周易)》 계사편의 '낙천지명고불우(樂天知命故不憂)'의 구절을 따서 '낙천(樂天)'이라 이름하였다. 또한 의정부 제조 변계량(卞季良)에게 <낙천정기(樂天亭記)>를 짓게 하고 한성부윤 권홍(權弘)으로 하여금 이를 쓰게 하여 9월 4일 판각하여 정자에 달았다.

태종은 낙천정에 행차하여 종종 중요한 정무를 친히 듣고 결정하기도 하고, 종친간의 화목을 다짐하기도 하였다. 즉 세종 1년 이 곳에서 세종과 함께 왜구에 대비하기 위하여 삼판선(三板船)을 꾸미게 하였고, 이해 6월 체찰사 이종무(李從茂) 등이 삼도 수군을 거느리고 대마도(對馬島)를 쳐서 평정하고 돌아오니, 그들을 위하여 환영연을 성대히 베풀고 상을 주었다. 세종 2년 정월부터 상왕(태종)과 대비인 원경왕후(元敬王后) 민씨가 아예 이 곳으로 옮겨 거처하게 되므로 왕은 수시로 나가 양전(兩殿)에 문안한 후 유숙하고 돌아옴은 물론 왕비 또한 때때로 낙천정에 나가 문안드렸다. 4월에는 중국사신을 접대하였더니 사신이 감탄하여 하늘이 마련해 준 선경이라 칭송하였다 하며, 때때로 상왕은 왕과 함께 이 곳에서 매사냥을 즐겼다 한다. 세종 3년 5월에는 오위진(五衛陣)이라는 군사훈련을 사열한 일도 있다. 그리고 도성과의 왕래 편의를 위해 살곶이다리(箭串橋)를 축조하게 하였다.

세종 4년(1422) 5월 상왕이 승하한 후 세종은 이 정자를 둘째 딸 정의공주(貞懿公主)에게 하사하여 부마인 연창위(延昌尉) 안맹담(安孟聃)과 함께 아름다운 풍물을 즐기게 하였다. 성종 3년(1472)에는 양잠을 장려하기 위한 잠실오 이용되었다. 정자가 퇴락하여 없어진 후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이 터는 도시개발로 인해 강변도로와 주택지가 되어 있었는데, 1987년에 서울시에서 한강변 문화유적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그 자취를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이에 1991년에는 옛 대산 기슭 부분 자양동 673번지에 새로이 정면 3칸, 측면 2칸, 주심포 팔작지붕의 정자를 건립하여 그 자취를 알리고 있다.

화양정

화양정(華陽亭)은 광진구 화양동 110번지 32·34호에 있던 정자이다. 이 일대는 태조가 한양으로 도성을 정할 당시 말을 먹이는 목장이었는데, 세종 14년(1432)에 낙천정 북쪽 언덕에 정자를 세웠다. 정자의 이름은 동지중추원사 유사눌(柳思訥)이 《주서(周書)》 가운데 '말을 화산 양지에 돌려보낸 다(歸馬于華山之陽)'란 뜻을 취하여 '화양(華陽)'이라 하였다. 남쪽으로 한강의 흐름이 보이고 북쪽으로는 삼각산·도봉산·수락산·용마봉이 한 눈에 들어오는 국립목장 살곶이벌(箭串坪) 언덕 위에 있는 이 정자에서 세종은 방목한 말들이 떼지어 노는 광경을 즐겼다고 한다.

한편 이 정자는 일명 '회행정(回行亭)'이라고 한다. 그 연유는 단종과 명성왕후와 관련이 있다. 세조 3년(1457) 6월 21일 단종이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어 다음날 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영월로 귀양갈 때 이 화양정에서 전송하였는데 "화양정, 화양정"하고 중얼거리며 이 길이 부디 다시 되돌아 올 수 있는 회행길이 되었으면 하고 떠났으나 결국 돌아오지 못하고 말았다. 이에 사람들이 슬퍼하며 그 원혼이나마 돌아오기를 비는 마음에서 화양정을 회행정으로 부르기도 하였다는 것이다. 또한 고종 19년(1882) 6월 임오군란이 일어나 명성왕후가 변복(變服)을 하고 창덕궁 뒷문으로 나와 장호원으로 피해갈 때 광나루까지 가던 도중 이 곳 화양정에서 잠시 쉬어갔다고 한다. 뒷날 명성왕후가 창덕궁으로 환궁하게 되자 사람들이 '정말 화양정이 회행정이 되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화양정은 그 규모가 매우 웅장하였다고 한다. 사각정(四角亭)으로서 기둥 둘레가 한아름이 넘었으며 그 내부가 100여칸 이상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화양정은 1911년 7월 21일 낙뢰(落雷)로 무너지고, 지금 이곳에는 서울시 기념물 제2호로 지정된 650년이 넘는 고목을 비롯한 7그루의 느티나무 고목만 서 있다. 1987년에 서울시에서 표석(標石)을 설치하여 그 자취를 알리고 있다.

효사정

2010-01-08 효사정(孝思亭)은 화장산 동쪽 지맥의 끝인 동작구 현충로 55 (흑석동) 한강변 남쪽 언덕에 있던 조선 초기의 정자로, 1993년에 복원되어 자리하고 있다. 이 정자는 조선 세종 때 한성부윤과 우의정 을 지낸 노한(1376∼1443)의 별장이었다고 한다. 노한이 이곳에서 모친의 묘살이를 극진히 하여 마치고 그대로 눌러 살았다. 그러면서 정자를 짓고 때때로 올라 풍광을 바라보며 오래도록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정을 품었다. 노한과 동서간이던 강석덕(姜碩德)이 정자의 이름을 지어달라는 청을 받고, 주변의 뛰어난 경치에서 이름짓기 보다 그 효성을 생각해서 '효사정'이라 지었다고 한다.

심원정

심원정(心遠亭)은 용산구 원효로4가 87번지에 있던 정자인데, 임진왜란 때 왜군과 명나라 군이 화전(和戰)을 위한 교섭을 벌였던 장소이다. 임진왜란 당시 전쟁이 일어난 지 1개월도 못되어 수도 한성이 함락되었던 전세는 시일이 경과함에 따라 조선 관군의 수습,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 명나라 군의 원군(援軍) 등으로 점차 조·명 연합군 측이 우세해졌다. 특히 행주대첩(幸州大捷)으로 자신을 얻은 조선군이 한성을 향해 일대 반격 내지 소탕전을 전개하려고 할 무렵, 왜군은 평양 전투에서 패배하여 남산 산록을 중심으로 이 곳 용산 일대에 모두 후퇴 결집하고 있었다. 왜군들은 모두 이 곳으로 쫓겨 들어와 무기와 식량 부족이 심각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한성을 탈출해야 한다는 절박한 사정에 놓여 있었고, 명나라는 전쟁을 더 이상 끌면서 확대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행주대첩 이후 자력(自力)으로 한성을 탈환할 것을 도모하고 있던 조선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전쟁 초기부터 일기 시작했던 화의론(和議論)이 대두되었다. 사실상의 작전권을 장악하고 있던 명군은 왜군 측의 화의에 대한 요구를 구실 삼아 조선 측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화의를 진행시켰다. 이러한 화의에 대한 명나라와 왜군의 강화회담이 한강 특히 용산강(龍山江)과 이 곳 심원정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 강화회담의 진행으로 용산강 일대를 차지하여 적의 퇴로를 차단하고 육상의 적을 섬멸하려던 우리 군의 작전계획은 차질을 빚었으나, 이 곳 심원정과 용산강 일대는 임진왜란 전쟁사에 있어서 한 전환점을 이룬 전적지(戰蹟址)로서의 의미가 크다고 하겠다. 그후 이 곳은 고종 때에는 영의정 조두순(趙斗淳)의 별장이 되기도 하였으며, 현재는 정자는 없고 '왜명강화지처(倭明講和之處)'라고 음각(陰刻)된 비(碑)가 남아 있다. 또 강화를 체결한 후 기념식수한 것이라 전해지고 있는 천연기념물 제6호로 지정된 백송(白松)과 느티나무 고목이 있어 옛 역사의 현장을 느끼게 한다.

『한강의 어제와 오늘 (서울시사편찬위원회 발간, 2001.10.)』 수록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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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정일 2019-03-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