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의 나루

서울에서 지방으로 이동하기 위해서 모든 주민들은 한강을 건너야 하기 때문에 배를 이용해야만 하였다. 오늘날은 다리가 건설되어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으나 조선시대에는 반드시 배를 통해서만 이동할 수 있었기 때문에 한강의 여러 곳에 나루가 생겨나게 되었다. 당시 나루를 설치한 근본적인 목적은 사람의 왕래를 위한 교통로, 물자의 운반을 위한 수송로, 국가의 안녕과 질서를 위한 초소로서의 기능에 있다.
조선시대 때 주요 간선도로가 통과해야 하는 한강에는 일찍부터 광나루(廣津), 삼밭나루(三田渡), 서빙고나루(西氷庫津), 동작나루(銅雀津), 노들나루(露梁津), 삼개나루(麻浦津), 서강나루(西江津), 양화나루(楊花津) 등이 있었다. 특히 광나루·삼밭나루·동작나루·노들나루·양화나루는 한강의 5대 나루로 손꼽혀 일찍부터 각종 물품과 사람들의 집합장소로서 유명하였다. 이들 나루의 도선장인 나루터를 오가며 사람과 물자를 건네 주는 나룻배는 한강 양쪽의 통로를 이어주는 최대의 편의시설이자 유일한 교통로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한강의 나룻배는 1970년대 이후 강 위에 많은 다리가 개통됨에 따라 점차 그 자취를 감추어 역사의 뒤안길로 스러져 갔다.
그러나 한가지 주목할 만한 사실은 오늘날 많은 다리들이 가설되면서 나루가 사라졌지만 가설된 다리의 위치가 대부분 조선시대 나루가 있었던 곳이라는 점이다. 즉 광나루에는 광진교와 천호대교가, 삼밭나루에는 잠실대교가, 뚝섬나루에는 영동대교가, 두모포에는 동호대교가, 입석포에는 성수대교가, 한강나루에는 한남대교가, 서빙고나루에는 반포대교가, 동작나루에는 동작대교가, 흑석진에는 한강대교가, 노량진에는 한강철교가, 용산진에는 원효대교가, 마포나루에는 마포대교가, 서강나루에는 서강대교가, 양화나루에는 양화대교와 성산대교가, 공암나루에는 행주대교가 각각 가설되어 있는 것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이는 과거와 현재 모두가 한강의 지리적 잇점과 남북을 연결하는 교통로의 역할이 가장 많은 곳에 다리와 나루를 설치하였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광나루(廣津)

조선시대 서울에서 중랑천을 건너 이곳 광나루에서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넌 후 광주를 거쳐 남쪽 지방으로 왕래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이 나루는 강원도와 남쪽 지방으로 가는 사람들이 주로 이용하던 곳이다. 오늘날은 그 자취를 찾을 수 없으나 현재의 광진교가 놓여져 있는 한강 북쪽이다. 광진은 처음에 중급의 나루였으나 곧 승격하여 태종 때에 별감이 배치될 만큼 요충지로 발전되었다. 조선시대 한강과 남한강 및 북한강 유역을 관리하면서 수운을 담당하고 있던 곳이 좌도수참(左道水站)이며, 좌도수참의 별감이 이곳 광나루에 상주하면서 한강을 왕래하는 사람들을 기찰하고, 한강의 조운을 관장하였다. 세종 때 삼밭나루가 개설되면서 광나루의 기능이 약화되었으며, 조선후기에는 송파나루가 번성하여 광나루 - 삼밭나루 - 송파나루 순으로 발전하였다.

삼밭나루(三田渡)

숯내(炭川)와 한강이 합류하는 지점이 조선시대 삼밭나루가 위치한 곳이다. 이 나루는 조선시대 세종이 한강 건너 대모산 기슭에 있는 아버지 태종의 헌릉을 참배하러 가는 길목이었을 뿐만 아니라 경기도 여주에 있는 영릉과 서울시 강남구에 있는 선릉을 참배하기 위해 임금이 종종 건너던 나루이다. 중종 31년(1536)에는 배를 이어서 배다리(舟橋)를 가설하기도 하였던 곳이다. 또한 한강 남쪽의 요새지인 광주부로 직접 통하는 제일 빠른 길목이었고, 도성에서 왕십리와 살곶이다리를 거쳐 삼밭나루를 건너 곧 바로 광주와 이천을 거쳐 충주로 나아가고, 이천에서 여주·원주·강릉 등지로 나아갈 수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붐볐던 곳이다. 조선후기에는 삼밭나루를 지나 광주로 나아가는 길목에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게 굴욕의 패배를 당하고 세운 삼전도비가 있어 많은 사람들이 이 길목을 이용하기 보다는 바로 옆에 새로이 조성된 송파나루를 주로 이용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이 나루는 조선 전기에 주로 이용하였던 나루터이다.

송파나루(松坡津)

석촌호수 부근에 위치했던 나루로서 조선초기부터 있었던 나루는 아니다. 조선후기 병자호란 이후부터 삼밭나루 대신에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이용하기 시작하였다. 송파라는 이름은 당초에 광주군 동부면 선리(船里)에 있던 마을이었으나 인조 25년(1647) 장마로 인해 마을이 떠내려가는 피해를 당한 이후 마을 사람들이 지금의 석촌호수 일대로 자리를 옮겨와 살면서 나루를 만들고 송파라는 지명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이 나루는 삼밭나루를 대신하면서 광주·이천으로 통하는 길목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조선후기 상업의 발달과 경강상인의 활발한 활동에 힘입어 송파장(松坡場)이 형성되었다. 이 시장은 한강 상류를 오르내리는 뱃길과 육로를 따라 강원도와 충청도 일대에서 올라오는 곡식과 목재·명주·솜·삼·과일 등 각종 토산물들이 집결되는 곳으로 늘 물건을 파는 상인들과 물건을 사고자 하는 사람들로 붐비던 장소였다. 뿐만 아니라 지역적으로 광주부에 소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도성에서 일부 상인들에게 특권을 준 이른바 금난전권(禁亂廛權)에 저촉되지 않고 자유로운 거래를 할 수 있었다. 또한 지리적으로 도성과 가까우며 사방으로 통행할 수 있는 교통의 요지였기 때문에 송파장이 크게 번성할 수 있었다. 그리고 송파장이 번성하였기 때문에 이 일대를 근거로 유행하던 민속놀이인 송파산대놀이가 유명해지기도 하였다. 이 나루에는 9척의 진선(津船)이 있어 통행의 편의를 도모하였다.

뚝섬나루(纛島津)

현재 영동대교가 지나가는 뚝섬 선착장 부근에 있었던 나루터로서 일명 독백(禿白)이라 하였다. 조선 효종 때 한강을 이용해서 목재·땔감이 거래되었기 때문에 국가에서는 이곳에 세금을 거두어 들이는 수세소(收稅所)를 설치하여 운영했다. 조선후기 한강 상류에서 목재를 물길로 운반하였는데 나라에서는 공사(公私)를 막론하고 1/10세(稅)를 받았다. 일제강점기 때는 이곳 주위에 재목이나 땔감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점포만도 약 40여호가 넘었다고 한다.

한강진나루(漢江鎭津)

조선시대 한강나루의 풍경 조선시대 제1의 도선장(渡船場)으로 옛날에는 '한강도(漢江渡)'라고 하였으며, 신라 때는 '북독(北瀆)'이라 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사평도(沙平渡)' 또는 '사리진(沙里津)'이라고 하여 중요한 나룻터로 지목되었으며, 서울에서 용산·충주로 통하는 큰 길의 요충지였다. 예전에는 서울의 남산 남쪽기슭인 지금의 한남동 앞의 강을 한강이라 하였고, 이곳의 나루를 한강도라 하였다. 오늘날 한강의 의미는 일반적으로 시점에서부터 물줄기의 끝까지로 인식되고 있지만 조선시대에는 이곳을 한강이라 하였다.
도성에서 남소문을 나서면 바로 한남동의 한강마을이었기 때문에 수도 방위상 매우 중요한 곳으로 일찍부터 별감을 파견하여 사람들의 통행을 기찰하고 통행의 편의를 도모하였다. 조선후기에는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지점이어서 이곳에 진(鎭)을 설치하여 관리하였다.

노들나루(鷺梁津)

노량진에서부터 양화진까지는 버드나무가 많았으며, 특히 노량진에는 백로들이 많이 날아와 '노들'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1900년 한강 최초의 다리인 한강철교가 이곳에 건설되었다. 이 길목은 시흥·수원은 물론 충청도·전라도로 통하는 대로로서 중요성을 인정받았다. 지금은 큰 다리가 놓이고 노량나루가 있던 지점에는 노량진수원지가 자리잡고 있어 옛 정취를 찾아볼 수 없다.상류의 광나루와 함께 별감이 배치되어 서울을 출입하는 사람들을 살피게 하고 군사를 주둔시켰던 나루로서 사람들의 왕래가 많았던 곳이다. 일명 '노도(路渡, 露渡)'·'노량도(鷺梁渡)'·노들나루라 불리었으며, 연산군 때는 이곳의 나루만을 통행하도록 하고 나머지 한강의 모든 나루를 봉쇄하기도 하였다.

마포나루(麻浦津)

도성 서쪽 10리 지점에 있었던 나루로서 일명 삼개나루라 불렀다. 오늘날 마포대교 북쪽 방면으로 반대쪽의 여의도는 예전에 백사장이었다. 백사장을 지나면 시흥을 거쳐 수원으로 가는 길이 된다. 도선장에는 주로 상선들이 운집하였으며, 나룻배도 사선(私船)이 중심이었다. 옛부터 마포나루에는 새우젓을 파는 사람들이 많아 '마포새우젓장사'라는 애칭이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지고 있다.

양화나루(楊花津)

서울시 마포구 합정동 지역의 한강 북안에 있었던 나루터이다. '양화도(楊花渡)'라고도 하였으며 서울에서 양천을 지나 강화로 가는 조선시대 주요 간선도로상에 위치하였던 교통의 요충지였다. 조선초기 바닷물이 용산까지 밀려와 한때는 용산이 으뜸가는 나루였으나 염창의 모래언덕이 조수의 침입을 받아 허물어지고 점차 한강의 수위가 낮아지면서 큰 배가 용산까지 직접 못 들어 오자 양화진이 요충이 되어 크게 번창하였다고 전해진다.
이 나루는 경상·전라·충청·경기도에서 올라오는 곡물을 서강 광흥창까지 운반하는 조운(漕運) 항구로서 농산물의 재분배를 담당하는 중요한 지역이었다. 고려 이래로 양천·강화를 가려면 반드시 이곳 양화나루를 건너야 했으며, 조선 영조 이후에는 송파진(松坡鎭)·한강진(漢江鎭)과 함께 한강의 삼대 관방으로 요충을 이루었다. 따라서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고 있어 일찍이 어영청에 소속되어 10척의 배를 가지고 순시하였으며, 진을 구축하여 관리들이 파견되어 있었던 곳이다. 이 지역은 한강 가운데서도 가장 경치가 아름답고 정자가 많았던 곳인 반면, 개화기 때 개화사상의 선각자로 널리 알려진 김옥균(金玉均)이 처형된 곳이기도 하고, 천주교가 처음 우리나라에 유입될 때 많은 신자들이 처형된 장소로서 역사적으로 유서가 깊은 곳이다. 오늘날 이곳에는 양화진 순교자기념관이 절두산에 세워져 있어 그 영령들을 기리고 있다.

공암나루(孔岩津)

공암나루는 현재의 강서구 개화동 한강 남쪽 지역으로 한강변의 나루터 중 서울시계 내에서는 가장 아래쪽에 위치한 나루로서 강화도 방향으로 가는 사람들이 주로 이용했다. 강 건너에는 고양시가 보이고 광주암(廣州岩)이라고 부르는 바위섬이 물 가운데 있어 기이한 풍치를 이루었다고 한다. 나루의 크기가 작아 양화나루 아래 예속되어 있었다. 옛 양천읍(강서구 가양동)의 진산인 궁산에서 한강을 내려다 보면 동쪽으로는 공암산이 있고, 그 산 아래 물가 모래밭에는 공암(孔岩)이라는 암굴(岩窟)이 있다. 공암나루에 배가 드나들던 모습은 사라졌지만 광주바위를 중심으로 조성된 구암공원이 인접해 있어 문화적 명소가 되어 있다.

『한강의 어제와 오늘 (서울시사편찬위원회 발간, 2001.10.)』 수록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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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부서 :
미래한강본부 - 한강사업총괄부 - 한강문화관광과
문의 :
02-3780-0763
수정일 :
2023-02-23
등록일 :
2022-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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