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과 임진왜란

1592년(선조 25년) 4월 14일 일본의 무장(武將) 고니시 유키나가(소서행장 小西行長)와 가토 기요마사(가등청정 加藤淸正)가 이끄는 20만 일본 대군이 ‘명을 침략하고자 하니 조선은 명으로 가는 길을 빌려달라’는 정명가도(征明假道)를 명분으로 조선을 침입하였다.

임진왜란 초기, 조선의 무장 신립(申砬)이 충주에서 패배하자 선조와 조정대신들은 한양을 포기하고 파천하였다. 물론, 수도 방비책이 세워져 한강변을 사수하고 있었으나, 왜군 일부는 남한강을 건너 서울의 동쪽으로 진격해 왔고, 한강변에 도착한 다른 왜군 부대도 별 저항 없이 강을 건넜다. 이후, 조선군은 패배를 거듭하며 압록강까지 밀려났다.

그러나 전쟁이 계속되면서 전열을 수습한 조선군은 한강변을 공략하여 남한강 전투에서 적의 보급로와 진출로를 차단하여 전세를 흐트러뜨리고, 권율 장군의 행주산성에서의 승전을 계기로 왜군을 퇴각의 궁지로 몰아넣어, 의병 등으로 하여금 각지에서 반격 할 수 있는 실마리를 만들어 주었다. 결국 벽제관 싸움에서 패배하여 전투 의지를 상실한 명과 행주산성에서 패배하여 식량부족과 전쟁에 지친 왜병은 한강상에서 강화회담 후 철수하였다. 이처럼 천혜의 방어 조건을 갖춘 한강은 국난시에 수도 한양을 보호하는 자연적 요새의 기능도 하였다.

일제침략과 한강

일제시대의 한강은 침략적 위치로서의 중요성이 높이 평가되었으므로 수로의 기능을 최대한 이용하였다. 한일수호조약에 의하여 원산이 개항되고, 인천항은 1880년 12월에 개항키로 결정한 후 1882년 4월에 개항이 되었다. 개항과 함께 근대적 교통로의 필요성으로 인하여 경인선이 1896년(고종 33) 미국인 모스(Morse, J. R.)에게 그 부설권이 특허되어 이듬해 3월 22일 기공되었고, 1899년 9월 18일 노량진~인천 간 최초의 영업을 개시한 이후 1900년 7월 8일 경인철도합자회사(京仁鐵道合資會社)가 완공시켜 개통되었다. 처음에는 회사이름을 따서 ‘경인철도’라고 불리다가 일본으로의 국유화가 진행된 1906년 이후부터 ‘경인선’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더불어 서울과 부산 사이에 부설된 복선철도, 경부선은 1899년에서 1905년 사이에 건설되었다.

또한, 만주사변 이후 물자의 수송거리의 단축을 위해 인도교 근처에 한강철교가 1944년에 완공되었다. 한강인도교는 1916년 중앙차도 4.5m, 좌우보도 각 1.6m로 기공하였으나 처음 가설한 인도교는 교통량을 감당할 수 없어 1930년대를 전후해서 급증하는 교통량의 해소방법으로 광진교를 1934년 8월에 착공하여 1936년 10월에 완공하므로서 인도교와 함께 한강을 도보로 건널 수 있는 2번째 다리가 되었다.

한국전쟁과 한강

한강은 그 길이가 514㎞에 달하는 대하이다. 그런데 한국전쟁사에서 한강선이라고 하는 지역에는 통상 양화교에서 광진교 사이의 24㎞에 이르는 한강변 일대가 포함되어 있다. 이 지역에서 수도 서울을 중심으로 하여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으며, 그 작전의 성패여부에 따라서 전세가 좌우되었던 까닭에 이 지역을 특히 한강선 이라고 일컫고 있는 것이다.
한강선은 대체로 하상폭 1~1.5㎞에 유수폭이 300~1,000m이며, 수심은 2~5m로 도하장비를 이용하지 않고서는 강을 건널 수가 없다. 따라서 한강선은 군사적인 측면에서 볼 때에 수도권 일원에서 가장 큰 천연장애물로서 중요시되고 있다. 한국전쟁당시 한강을 건너는 교통수단은 나루터에서 배를 이용하거나 한강위에 가설된 다리를 통하는 두가지 방법이 있었다.

나루터는 서강 - 율도의 가중리나루와 마포 - 여의도의 마포나루, 서빙고에서 잠원동으로 건너는 서빙고나루와 한남동으로부터 신사리로 가는 한강나루, 그리고 뚝섬에서 압구정동으로 통하는 뚝섬나루 및 광장동 - 천호리의 광나루등 6개소가 전술적인 이용도가 높은 여건을 지니고 있었다. 이들 나루터에는 각각 몇척씩의 작은 부선과 목선이 있었지만, 한국전쟁당시에는 대부분 국군과 서울 시민들이 철수 또는 피난할 때에 이용하여 남쪽 강변에 버려져 있었다.
그러므로 북쪽에서는 많은 병력이 동시에 강을 건너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그러나 그 중에서 한강나루에는 차량을 도하시키는 시설이 갖추어져 있었기 때문에 대부대의 도하작전이 가능하였다.

한강선에 가설된 교량은 한강대교와 광진교의 두 개의 인도교와 경인선(상행 및 하행)의 단선철교, 그리고 경부선의 복선철교 등 모두 다섯 개의 교량이 있어서 강을 건너는 주된 교통수단이 되고 있었다. 이 교량들은 1950년 6월 28일 이른 새벽에 국군 공병부대가 폭파시켰다. 한강 9·28 수복이후 한강대교의 파괴된 경간에 한강가교 설치공사를 착수하여 같은해 10월 19일에 개통식이 거행되어 시민교통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성립되고 10월 한강가교의 확장과 보도 증설공사가 시공되어 1957년 1월에 복구공사를 착수하여 1958년 5월 15일 준공되어 서울의 명물이었던 한강대교가 새로운 모습을 되찾게 된 것이다.

관련 시설

더보기 +
5738
담당부서 :
미래한강본부 - 한강사업총괄부 - 한강문화관광과
문의 :
02-3780-0763
수정일 :
2023-04-07
등록일 :
2022-12-13

댓글은 자유로운 의견 공유의 장이므로 서울시에 대한 신고, 제안, 건의 등
답변이나 개선이 필요한 사항에 대해서는 전자민원 응답소 홈페이지를 이용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댓글의 내용이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저작권 침해 등에 해당되는 경우
관계 법령 및 이용약관에 따라서 별도의 통보없이 삭제될 수 있습니다.

응답소 홈페이지 바로가기